중국 근대사: 1840년 아편전쟁 ~ 1919년 5·4 운동 (봉건사회 →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의 변화)
'반식민지 반봉건'이라는 용어는 모택동이 창안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따르면 봉건사회의 다음에는 자본주의 사회가 와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사회의 요소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절반의 봉건사회와 절반의 자본주의 사회'라는 뜻으로 '반봉건'이라고 말했다. '반식민지'는 표면적으로는 주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 근거하여 '중국 사회의 주요한 모순'이 '인민대중과 봉건 통치계급', 그리고 '중국 민족과 제국주의'간의 두 모순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1) 아편전쟁
청과 영국간의 전쟁이다. 영국은 19세기 초엽부터 청에 아편을 팔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밀수출하였다. 영국의 정부가 아니라 영국의 상인들이 한 것이지만 영국 정부도 이를 방조하였다. 아편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파괴하는 무서운 마약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영국이 마약을 팔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여 국가가 나서서 전쟁을 도발했다. 세계 역사상 어느 강대국도 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마약과의 전쟁'이 아니라 '마약을 밀수출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소위 '서양문명국가'의 정체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영국은 전쟁도발의 동기가 부끄러웠던지 당시 중영 간의 무역에서 영국이 당한 막대한 수입 초과를 벌충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국과의 자유로운 무역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청은 전쟁에 져서 남경 조약을 맺었는데 강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영국은 무력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여 마약을 합법적으로 수출하게 되었고 홍콩을 할양받았다. 뒤이어 미국과 프랑스 등이 영국을 뒤따라 청과 불평등 조약을 각기 강제로 체결했다. 이런 일련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로 인해 중국은 주권을 심각하게 상실당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을 중국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편 수입을 강제당한 것이 주요한 이유가 아니라 아편전쟁을 계기로 하여 중국의 사회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해 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주권이 침해를 받기 시작했다.
(2) 태평천국전쟁(1851~1864)
서양 국가와의 최초의 전쟁인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자신의 무력을 분명하게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소를 잃은 뒤에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당시의 청나라 정부의 입장이야말로 역사상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나라 정부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러자 중국에서 '농민기의(起義)'라고 말하는 농민폭동이 부단히 발생했다. 이 중의 하나가 태평천국을 세우기 위해 일어났다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대 규모이고 또 최장 기간 지속된 농민폭동이었다. 이는 전국의 17개 성에 파급되었고, 600여 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14년간 지속되었다.
중국에서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농민혁명운동'으로서 '태평천국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외국에서는 거의 '태평천국의 난'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현대 역사에서 '동학란(東學蘭)'이 '동학혁명' 또는 '동학 의거'로 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평화로운 하늘나라'라는 뜻의 '태평천국'은 이 사건의 주동자인 홍수전이 지상에 건설하고자 했던 국가의 명칭이다. 그는 남녀평등을 주장하여 여성 부대를 조직하였으며, 빈부격차에 반대하여 만민평등을 주장하고 유가 사상을 비판했다. 못 사는 사람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매혹적인 주장을 폈던 것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방향과 거의 비슷하다.
이 사건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서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다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이다. 이번에는 북경으로 진격하여 문화재 가치가 있는 원명원을 파괴하여 청에 겁을 주었다. 원명원은 서양 궁전들을 모방하여 강희제가 만든 정원인데, 지금도 당시에 파괴된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청정부를 위협하여 '북경조약'을 체결하고 더욱 많은 이익과 특권을 빼앗았다. 러시아도 이 틈에 손을 뻗쳐 영국과 프랑스와 비슷한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흑룡강 연안 지구의 넓은 영토를 빼앗았다.
청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와 이같이 타협한 뒤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힘을 빌려 외국 군대의 무력으로 자국 국민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청정부는 동학 의거 때의 조선 정부와 똑같다. 이때 서양 국가들의 돈을 받고 고용된 한 미국의 용병 장교는 항상 전투에 이겼다고 해서 '상승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 중일 갑오전쟁(청·일전쟁 1894)
청·일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이 일어났던 1894년이 간지(천간과 지지-干支)로 갑오년이기 때문에 중일 갑오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바로 우리나라였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청은 '자기 것'으로 간주하던 우리 나라를 내놓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양국 모두 우리 나라를 저들의 밥으로 생각한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를 먹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예전에는 우리와 중국에게 늘 무시당하던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급기야 우리까지 넘볼 정도로 국력이 커졌으며, 청은 제 나라 간수도 못하면서 우리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매우 오랫동안 우리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던 청이 지면서 우리에 대한 종주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청조 정부는 일본과 타협, 양보하여 일본과 굴욕적인 '마관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근거하여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은 2억 냥의 배상을 받았다. 또 중국의 통상 항구에 공장을 세우고 자유 통행하는 특권도 획득했다.
이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대국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서양 국가 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중국은 함부로 뜯어먹어도 탈이 없는 만만하고 힘없는 국가로 치부되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중국에 투자하고 조계지를 강점하여 세력 범위를 나누었다. 미국은 이후에 중국에 진출했는데, 다른 제국주의 열강에 뒤질세라 1899년에 '문호개방'정책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었다. 이를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자는 정책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것은 서양 각국이 중국에 있는 자기네의 세력범위를 독점하지 말고 사이좋게 같이 나눠 쓰자는 것이다. 자칫하면 더 많이 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에서 자기들끼리 전쟁이 날 염려 때문에 각국은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중국은 '망국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중국이 처한 상황이었다.
(4) 백일유신(1898년)
서양 각국에 당했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청정부가 일본에 당한 뒤에는 정신을 조금 차렸다. 황제는 정신을 차렸지만 청정부 전체가 합심해서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는 강유위, 담사동, 양계초 등 일부 지식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자산계급 개량파' 또는 '유신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방하여 중국을 강성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 유가경전의 암기 위주는 팔고문 과거제도를 폐지했으며,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황제 독재 제도를 황제 입헌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한마디로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전체를 모두 바꾸려고 혁명을 시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 시도한 것과 비슷하지만, 외국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도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는 시도한 지 불과 103일 만에 실패했다. '백일 유신'의 백일이란 이 사실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실패한 원인은 서태후의 반발 때문이었다. 서태후는 황제가 아니면서도 당시 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태후의 반발은 개혁에 반대한 탓이라기보다는 정권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실권을 가진 서태후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개혁으로 서태후를 제압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가 간지로 무술년이기 때문에 '무술변법'이라고도 부른다. '변법'이란 '방법을 바꾸다'라는 뜻의 중국 옛말이다. 이후 유신파의 주요 인물들은 외국에 망명하거나 피살당했다.
(5) 의화단 운동(1900년)
이 사건 역시 예전에는 '의화단의 난' 또는 '장발적의 난'이라고 격하하여 불렀었다. '장발'은 이들이 당시 통상적인 헤어스타일과는 달리 긴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지만, 도적이란 뜻의 '적'은 일종의 범죄 집단으로 비하하기 위한 것이다.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운동'이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서양 각국이 중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이후 이것의 덕을 보려는 서양의 상인, 깡패, 군인, 선교사 등이 중국에 들어와 중국의 민중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전통문화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1900년 중국 농민들은 반외세 운동을 전개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반제 애국운동'이라고 한다. 의화단이란 '의화권'을 단련하는 사람들의 단체라는 뜻인데, 의화권이란 중국식의 천천히 하는 맨손체조의 한 유파이다. 이것은 먼저 산동에서 일어나 북경과 동북 등지로 발전했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구호를 내걸었는데, 국가를 지키고 침략자를 물리치자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서 청정부는 그들에 대한 민중의 지지로 간주하고 이를 지원했다. 의화단은 외국 군대의 총격을 겁내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 서양 선교사를 징벌하여 외국 열강의 모욕과 중국의 약탈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동시에 서양을 중국에서 몰아내겠다는 강렬한 결심을 표현했다. 의화단 운동은 전국을 진동시키고 세계를 경악하게 하였다. 중무장한 군대에 맨손으로 맞선 것이기 때문이다. 의화단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북경에 있던 서양인들은 한때 전멸될 위기에 처했는데, '북경의 55일'이라는 미국 영화를 통해 이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파된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제국주의 열강은 8국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을 학살하고 해체시켰다.
1901년 9월 청정부는 외국 침략자에게 항복하고 이들과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각국은 북경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의화단의 저항은 무모하였고 희생도 컸지만, 서양 각국에 만만히 당하지 않는다는 중국인의 의식을 각인시켜 주었다.
(6) 신해혁명(1911년)
신해혁명은 1911년 10월 10일에 호북성 무창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군사적인 폭동이었으며, 오래지 않아 호북성의 행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청정부와 지방 각성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지방 각 성의 세력은 호북성의 군사봉기를 계기로 청정부에 독립을 선언했고 중화민국의 건국까지 발전했다. 이리하여 호북성의 지방 군사 봉기는 '신해혁명'이라는 명칭으로 격상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제국주의와 결탁한 청정부에 대한 투쟁으로 간주하여 반제 반봉건 투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중국에서 발생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가 주동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부유한 상인 또는 기업주를 뜻하는 부르주아는 중국어로 자산계급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해혁명을 이들 민족 자산계급이 일으킨 자산계급혁명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신해혁명을 자산계급의 대표인 손중산이 일으켰다고 본다. 손중산은 손문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사실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그가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청말 반청무장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이다.
손중산은 중국의 위대한 자산계급 혁명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일본에서 조직한 동맹회는 "만주족을 내몰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고 토지권리를 평등화한다."라는 민주주의 혁명 강령을 내걸었는데, 이는 자산계급 정당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산 계급은 무산계급의 반대말인데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의 중국어 번역어이다. 손문은 동맹회의 강령을 '민족, 민권, 민생', 즉 삼민주의로 개괄하고, 자산계급 공화국을 수립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남경에 수립되었으며 손중산은 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고 군주 전제체제가 종결되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민족자본주의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고, 따라서 자산계급과 자산계급 정당도 기반이 악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1912년 2월 군주 입헌파와 북양군벌 원세개의 협공으로 손중산은 임시대총통직을 '봉건 매판' 원세개에 양도하였다. 원세개 북양군벌은 이민족인 청정부에 협조하고 그 아래에서 관직을 지낸 인물들로, 이들은 중화민국 초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반면에 손문의 국민당과 여타 남방의 세력은 청조와 관련이 없었고 이들 청조의 잔존 관료 세력과 대립하였다. 말하자면 반정부 세력이었던 것이다.
댓글